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모리예 지방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고대 연해주는 북쪽은 [[숙신]]인들 같은 [[퉁구스]]계 종족, 남쪽은 [[동부여]], [[북옥저]]와 같은 [[예맥]]계 종족의 땅이었고, 일부 북시베리아 계통의 종족들이 남하해서 주거하기도 했다. 서기 5세기 경에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이하며 [[고구려]]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[* 2009년 연해주 크라스키노 지방에서 530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[[고구려]] 석성이 발굴되었다.] 고구려 멸망 후에도 [[나당전쟁]] 패배로 고구려 고토 제어에 지장이 생긴 당나라가 연해주 지역까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가 8세기부터 [[발해]]의 통치를 받았고 발해가 멸망하고 [[요나라]]와 발해의 부흥국들([[발해부흥운동]]), [[금나라]], [[원나라]]의 지배를 차례대로 받았다. 이후 [[명나라]] 시기 초기에는 여진족 치하에서 명목상 명나라에 속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명나라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여러 종족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는데 이후 중만주 일대의 [[여진족]]이 주도권을 잡게 되어 [[후금]]이 건국되었고, 후금이 세를 떨치게 되면서 [[청나라]]로 발전한 뒤 연해주도 청나라의 통치 아래에 들어서게 되었다. 이 쪽의 원주민은 [[만주]] 일대에 걸쳐 사는 [[여진족]]-[[만주족]]이다. [[나나이족]] 등의 야인여진 계통의 소수민족도있다. 한편 [[동유럽]]에서 [[모스크바 대공국]]을 중심으로 작은 소공국들을 통합하여 성립된 [[루스 차르국]]은 점점 세력을 넓혀 [[시베리아]]를 넘어 결국 동아시아의 끝자락인 이 지역까지 다다랐고 청나라 역시 자신들의 원류인 [[만주]]의 배후지인 이 지역을 쉬이 넘겨줄 수는 없었다. 하지만 청나라에겐 러시아의 우수한 무기가 버거웠고, 러시아 역시 소수의 탐험대와 변방인들로 청나라의 대군과 싸우는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. 결국 청과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게 되었고[* [[청나라|청]]군과 루스 차르군이 충돌한 [[나선정벌]]도 이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.] 그 끝에 1689년 [[네르친스크 조약]]으로 [[청나라]]의 영유권을 인정했다. 그러나 200여년이 지나 [[청나라]]의 국력이 쇠한 가운데 [[제2차 아편전쟁]]의 중재를 하는 와중에 [[러시아 제국]]은 중재의 대가로 청에 연해주를 요구, 결국 1860년 [[베이징 조약]]을 체결하여 청나라가 연해주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. 더 나아가 러시아는 [[의화단의 난]]에서 20만의 병력을 진주시켜 만주를 점령하여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, 또 동만철도가 있는 북만주와 하얼빈을 차지하고 [[송화강]]([[하바롭스크]])과 [[고비 사막]]을 러시아-청의 경계로 삼으려 하였다. 그러나 [[러일전쟁]]에서 일본에게 패배하여 팽창이 정지되었으며, [[국공내전]]에서 동청철도 및 [[다롄]]과 [[하얼빈]] 조차지에서도 물러나 현재에 이르고 있다. [[적백내전]]기에는 한때 백군의 근거지였다가[* 소련 군가 [[계곡과 언덕을 넘어]]에서 백군의 요새 연해주 운운하는 대목이 이 시절의 상황이다.], [[극동 공화국]]을 거쳐 [[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]]에 편입되었다. [[1972년]]에는 [[중국어]]/[[만주어]]에서 유래된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정했다. 초기엔 러시아의 극동 지역 중 유일하게 [[농업]]이 가능한 지역이'''었'''다. 과거형인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[[아무르주]]등에서도 농업이 시작됐기 때문.[* [[흐루쇼프]]가 [[처녀지 개간 사업]]을 시작하면서 프리모리예뿐만 아니라 아무르 등 남시베리아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간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